적다: 23.10.01.~24.09.28.

그들은 연대하지도 않는다.

거의 전 생애 동안 진리라고 믿어 온 것이 비진리라고 밝혀진다면, 나는 의연하게 개종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기계를 창조한 이들, 그 일부가 되어 끈질긴 사보타주에 맞서 끊임없이 기계를 생성하는 이들, 그들을 몹시도 존경한다. 실로 “무한한 것은 인류이고, 그밖의 모든 것은 유한”하니.

무한 앞에 단순한 비존재로서 서 있기란 참으로 끔찍한 일.

나는 존재해 왔나? 존재하고 있나?

‘존재하기’는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무언가일까?

자신의 기억으로 말미암은 존재.

존재자가 존재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헛소리 아닌가?

추한 것들을 참아 주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욕망들이 세계를 어떻게 더럽히는지 구경하곤 한다.

저희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는 것.

그러네. 합당한 가격 같은 건 없다.

코헬렛, 그는 구경꾼들의 왕이다.

나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어서.

앎이 삶을 가져오는가? 그렇다 한들, 앎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가?

승패를 가르는 건 언제나 유치하지.

심지어, 구경꾼을 구경하며 소진되는 삶이 있다. 아니지, 그건 삶이 아니지.

악은 공모하건만.

즐거운 학습? 즐거운 반성? 모든 곳에서 엔터테인먼트를 찾으려 들면 안 된다.

정확하게 사유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내가 타인을 경멸하는 까닭에, 타인이 나를 경멸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진리가 있음을 알아서 행복하지만 진리의 내용을 몰라서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리인 줄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서, 단 하나만 남긴다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승패, 순위, 점수, 지긋지긋.

억울한 이들의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으로 죽기.

그러나 오를 능력이 없음을 알고, 그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구나.

절망을 승화할 방법이 없을까?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게 품위 유지인 것을.

이상을 그리면서 현실을 즐기는 게 쉽지는 않지.

나의 느낌과 생각만을 알고, 저편은 전혀 알지 못한다.

나의 무지는 죄가 아니라 벌이다.

집 안에도 있는 것을 집 밖에서 찾지 말 것.

어째서 ‘고통을 줄이기’를 우선시하지 않는지?

살아 있는 것들은 대체로 시끄럽다.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일인데 대단하기는.

참 요란하게들 나이 먹는다.

보편적 지식의 체계를 수립하여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휴가는 휴식과 반성의 시간. 놀이는 별개지.

언어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는데, 영상은 너무 어렵다.

나의 허영으로 남을 망가뜨리지 말고 남의 허영으로 나를 망가뜨리지 말자.

슬프다, 그들의 그 많은 공부가 어디로도 데려가 주지 못했다니.

의식주는 노예적이다, 몸은 노예적이다, 삶은 노예적이다, …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싫어하는군.

가짜 불평. 저렇게 열심히 여행 다니고 먹고 마시는데.

감출 수조차 없는 것, 따라서 멸시를 피할 수조차 없는 것.

아파트 단지란 너무 낯선 세계다. 성 안의 사람들.

나의 주절거림으로 바이올린 소리를 가리지 말 것.

나에게 딱 그만큼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그분들을 거쳐.

소음 안에서 살되 조금도 보태지 말 것.

모든 영역에 나름의 숙련이 있다. 롤테이너에 물건을 쏟아지지 않도록 쌓기, 팔레트 위에 정연하게 적재하기, 수백 명이 먹을 음식의 간을 조절하기, 선입 선출이 용이하도록 창고를 정리하기, 재료를 효율적으로 준비하고 제품을 조립하기, … 신입이 다르고 1년 차가 다르고 5년 차가 다르다.

오래 이어져 왔다는 사실 자체는 가치가 없다. 사람이든 관계든.

무의미를 아는 만큼만 의미 있는 삶.

먼지가 되기 전에 자기 자신이 될 것.

잠든 상태, 깨어 있는 상태란 무엇일까?

안 하던 일을 이것저것 반 년쯤 해 봤다. 대체로 헛짓이었다.

나의 세계는 확장되기는커녕 쪼그라들어만 간다.

사람이 버겁다.

어머니, 학우들, 그리고.

정치관, 종교관, 독서 취향, 음악 취향, 검약, 채식, 무엇보다, 허무를 직시한다는 점에서.

멀건 정신으로 또 한 해를 보냈구나.

예술가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오직 나 자신이어도 괜찮다.

침범하기, 보금자리로 삼기.

관계 맺기, 공동체를 이루기, 오직 그것을 향할 때만 의미 있는 비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어두컴컴하고 냄새 나는 곳에서 “품위 없이” 죽게 되리라, 우리 모두.

사회적 문제를 생물적 문제로 치환하는 오류.

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라.

누가 교육자를 교육하는가?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그 길을 걸었기 때문에 못 한 것이 아니라, 못 할 것임을 내심 알았기 때문에 그 길을 걸은 것.

나에게는 누구보다 내가 필요하다, 그 어떤 타인보다 나와의 관계가 절실하다, 나 자신인 나,

조선인들은 공화국을 바라지 않는다, 민주국만 원하지.

기쁨이 슬픔을 덮지 못하고, 슬픔이 기쁨을 덮지 못하지.

정신은 단순하고 육체는 복잡하구나.

그래, 누구 말마따나 “복음을 듣고도 구세주를 믿지 않”음은 “지옥 갈 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복음은 전해졌는가? 그가 왔고, 우리는 믿는다.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저주를 퍼부음으로써? 아니면 세상을 겁내지 않는다는 듯 권세를 무너뜨리고 약자를 일으킴으로써? 이 세상 바깥에 속한 사람이 왔고, 우리는 이 세상 바깥에 속하고자 한다. 어떤 방식으로?

모든 관계에서 맞닥뜨린 한계.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평행 상태.

지친다.

그들은 그들을 살고 나만이 나로서 산다.

한 걸음을 위해서 무엇을 내놓을 텐가?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나?

노예적이지 않은 부분을 노예로 부리려면 훨씬 큰 대가를 지불해야지.

잠시 발 담가 본 게 전부면서, 앵무새처럼 족보만 외고 최신화를 안 해.

이것은 상품이 아니다.

“너의 일을 하고, 너 자신을 알라.”

오로지 아름답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 가짜 아름다움과 진짜 아름다움.

영원의 물음, 이해할 수 없는 것, 느낄 수만 있는 것, 배울 수 없는 것, 상기할 수만 있는 것.

이를테면 가속도의 방향과 같은 것이다.

“자유의 대가는 고독”

지금들을 위한 말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무의미하기에 유의미한 것.

“진리를 떠받치는 손들”

모든 부문을 수익화하려는 태도가 삶과 세계를 망가뜨린다.

아주 작은 사명감과 주인 의식이라도.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설득하기의 불가능성, 보여 주기의 불가피성.

푹 잠기어 있기.

一言以蔽之曰空

선택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일어난 일일 뿐인.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슬픔, 혹은 분노. 무엇인지 모를 것을 허무로 덮어 버리려고, 혹은 신앙으로 가두려고 애쓰는데.

어째서 제게는 감관을 주지 않으셨나이까.

위악추속을 말하지 않으면서 진선미성을 말할 수 있는지?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주는 사랑’이란 실로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것.

일단 ‘진짜 선택’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그러고 나서 책임을 묻자.

“많은 사람이 스물다섯에 죽지만 일흔다섯에야 묻힌다.”

예술을 위한 신앙.

“Credo ut intelligam”

못 알아듣겠으면 연이 아닌 거지.

이대로라면 끝내 청산할 수 없는 빚이 된다.

의무로, 혹은 자기 만족으로, 혹은 신을 향한 사랑을 보여 줄 계기로 선을 행하는 게 어때서?

“이 시대는 내게 불쾌하다.”

모두에게 거대한 파괴력이 주어진다는 것, 그게 문제다.

“전통이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보존하는 것이다.”

각자의 광증 안에서 산다.

인류가 거대한 전쟁을 막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재난, 재앙 같은 단어는 당하고 만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환경 파괴, 계급 차별, 성 차별, 인종 차별, 욕망, 욕망, 욕망, …

악을 도려내고 선을 건설하기.

의무와 오락을 분별하기.

그렇다, 2000년 전에도, 1500년 전에도 이미 규율이 내려졌다. 나는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안의 하느님을 하느님께 온전히 돌려드리기 위해서.

영혼의 떨림을 표현할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

도시의 인간들이 병들어 있다.

요약되지 않는 글을 읽기.

위대한 그들은 깨달았고 일깨웠다. 그들의 위대함은 깨달았다는 데 있나, 일깨웠다는 데 있나?

지척에도 세계가 있다. 겉만 핥으면 무엇이든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차라리 예술을 즐겨라.

머니 호딩도 정신병이다.

사람을 너무 쉽게 포기해서, 그래서 자녀를 양육할 자신이 없다.

믿는다, 백 명에 한 명, 돌아보는 이, 나와 같은.

각자 사랑하는 방식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슬프고 아프다.

합주는 제례와 같은 것.

절대 다수의 인간이 환상 안에서 안락함을 느낀다면 그 환상을 지탱해야 하는가?

철없을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나? 누구 마음대로?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한다. 해야 하니까 한다. 해야 할 일을 찾을 것.

법? 저 치들과 같은 데서 만족하려는가?

역시 고통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용서될 턱이 있나?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리라는 확신이 나를 미치게 한다.

성실하든가 진실하든가, 둘 중에 하나는 갖추었어야지.

두렵습니다, 믿음 없는 저를 도우소서.

누가 나를 증언하는가? 아무도.

“예, 끊어 버립니다.”

돈 타령 외모 타령 지겨워 죽겠다.

어떤 역설. 생에 집착하는 까닭은 생의 유의미함에 대한 믿음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세계를 허무는가? 생의 무의미함에 대한 믿음은 어째서 세계에 대한 돌봄과 양립하는가? 어쩌면 양자는 무의식적으로 반대항을 믿고 있지는 않을까? 허무를 견디지 못해 몰아로 도피하는 한편, 실재에 깔려 죽지 않으려고 공을 되뇌이는 것은 아닐까?

무너지는 걸 막지 못하고 지켜보기가 괴로우니까, 저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최면으로 빠져들 수밖에.

그 푸에테, 끝내 휘청이고 만.

해독 불가한 책의 난외 주석으로서의 삶.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자의 존재를 바라는지도.

“나를 위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그들을 위하는 일이 나를 위하는 일임을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나를 마음껏 역겨워하시오.

순수한 예술. 그러나 사람들이 예술 외에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일부 예술이 정치적일 필요도 있지 않은가. 그마저도 보지 않으려 하면 가능한 한 많은 예술이 정치적일 필요도 있지 않은가.

구조적 해법 외엔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순간 구조적 해결 또한 난망해지는 법이라.

자기 목을 조르면서 숨 막힌다고 불평이라니.

최종 심급은 자신의 이성이다.

맛으로 유난 떠는 것들이 지긋지긋하다!

시대와 불화하되 자신을 연민하지 않기.

“욕망을 갖게 하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엘리후의 자리.

내가 누구인지 나만이라도 기억하고 되새겨야 한다. 증언.

설령 세계가 나를 떠밀었더라도 나는 나를 책임져야 한다.

그런 것까지는 몰라도 되잖나, 내가 평론가도 아닌데.

그럼에도 지치지 않는 사람들을 보라!

비위. 그게 많은 걸 말해 준다.

선택받은 이들은 기쁘게 대속하라!

관습을 개인의 감정보다 신뢰할 이유가 있나?

그분에게서 시시한 노인의 모습이 스쳐갈 때마다 몹시 슬프다.

‘나와 당신이 가진 걸 더 내놔야 합니다’야말로 진심을 뱉도록 만드는 주문이지.

말을 믿지 말 것. 나의 말이든 남의 말이든.

거듭 새길 것, 우리가 적도고 그들은 극단이다.

나의 도덕,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나의 도덕을 수립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고귀한 의도’를 가지고 실질적으로 뭘 했나?

자기 이익을 좇아 한 패가 된 인간들이 공공선으로 도약하는 모습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21세기에도 누군가는 사냥을 취미 삼으니 골프도 50년은 더 치겠지. 끔찍하다.

삶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는 기획은 실로 혐오스럽구나.

확신해야 하지만 확신해선 안 된다.

나는 잘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다.

관광객이란 지긋지긋해.

감정이라는 설명 틀에 갇혀 버린 경박함.

Vado mori, vado lente mori.

민콥스키는 바순 연주자였고 넬슨스는 트럼페터였으며 래틀은 심지어 타악기 주자였다. 오보이스트였던 켐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데이비스의 예도 있다.

그들에게 감탄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들이 읽은 것을 읽기.

과거의 메모를 읽어도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떠오르질 않는다. 과거의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의 메모조차도. 몇 시간 짜리 의식만 지니고 살아가는구나.

작고 짧게 타오르다 꺼진 불꽃.

위를 향한 상상력이 부족해서 죄를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래로의 상상력이 모자란 자들이 악을 저지른다.

물을 세게 쥐면 전부 잃어버린다. 손을 오므려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들여다보는 데 만족해야 한다.

philosophia? philodoxa.

“인간은 진리를 발견했으나, 그것을 파악하지도 유지하지도 이용하지도 못한다.”

단언할 수 없는 것, 물을 수만 있는 것. “나는 무엇을 아는가?”

“먼지 중의 먼지이며, 오물 중의 오물이라!”

PULVIS ET CINIS

GNŌTHI SAUTON, NOSCE TE IPSUM

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

자살과 신앙. 자기를 여의기. 결단은 논리적 모순을 극복한다.

신을 위해 인간이 있고 인간을 위해 신이 있다.

동물로서 지니는 숙명들. 무엇에 복종하고 무엇을 넘어설 것인가.

어째서 각자는 명민한데도 모이면 어리석은지.

마음을 지니고만 있어서는 부족하다. 조악하게라도, 볼품없는 쪽지로라도, 투박한 말 몇 마디로라도.

자신은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았노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이 나이에도 그러는 건 꼴사납다. 정직하게 인정하자,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 결과가 이렇다고.

우리의 자기 완성의 재료로서의 인류.

유용한 표지. 그런 판단력을 지닌 사람들을 무슨 수로 믿나.

모르는 것은 불신하겠다.

진리가 아님을/없음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 무의미를 확신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기.

그들의 진리와 나의 진리가 모두 참이지만 모두 참일 수는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언제나 동시에 알고자 하며 하고자 할 것.

고요함, 이 모든 부산함의 끝에서 얻어야만 하는 것.

정화하고 정돈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쌓는 일을 하고 싶다.

자기 완성을 위해 남의 자기 완성이 필요하다면 그를 도와야 하고, (남의) 자기 완성을 위해 세계의 변혁이 필요하다면 그를 도모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목적은 나의 자기 완성.

潛照堂

나는 인정욕이 적다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것 같은데, 1년 반을 지내고 보니 그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신념과 의제를 공유해야 친구가 되지. 나를 진리로 이끄는 사람들.

계급, 환경, 젠더.

우리가 위대해질 순 없어도, 시시한 것들만 이야기하면 너무 시시하잖아.

“그 시절은 지나갔고, 모든 것은 사라졌다.”

유난 떤다는 소리 들으려고 입 아프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선을 긋는 게 당연히 합리적.

스스로 합리화하려고 온갖 것을 운명적 표지로 받아들이는구나. 우습다.

저런 흉물들을 지칭할 단어가 필요한데.

날들을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끝없는 좌절과 자기 혐오에 빠지는구나.

어서 늙고 싶다, 비난도 애도도 없는 죽음을 위해.

나에게/세계에 무엇을 남길까?

“끊임없이 움직이면 생각하지 않게 된다.”

언제나 남보다 늦는다는 건 꽤 부끄러운 일이다.

맞다, 무언가를 남길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무엇도 남지 않도록 노고를 쏟는 게 맞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마땅히 할 일을 직업으로 연결하면 삶의 완성에 조금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다수인 약자부터.

그분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증거가 될 것. 그것이 우리의 의무.

문명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인 동시에 자연에 찬미를 보태는 일, 그리고 동시에 나를 지우는 일.

지각의 부족은, 말하자면 지각의 부족도 지각하지 못함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무지한 구경꾼과 지혜로운 구경꾼.

하늘 높은 데로 뻗치는 찬양의 손들.

의욕하지 않겠다고도 의욕하지 않기.

시장에서 벗어나기.

유무형의 선물을 주고받기.

마을 서재, 마을 정원.

발자국을 지우면서 여생을 보내자.

그들도 무엇이 올바른지 안다, 그들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에 가장 크게 고통스러워하는가? 그들에게 가장 중대한 부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이 그들을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게 만드는가?

몸으로 일하기. 지상에서의 시간을 흘려버리지 않도록. 정직하게; 흔적을 지우기. 모자랄지언정 체념하지 말 것.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약자들과 동행하기. 공감은 퇴행적. 그보다 나은 도취를 위해.

“계급 투쟁 없는 생태주의는 그냥 가드닝이다.”

동지, 낡았지만 그만큼 정확한 말도 없어서.

꼴값하지 마라. 당신의 허영에 나를 이용하지 말라고.

독해하기, 애호하기, 믿기.

나에게 편안한 질료를 찾되, 질료에 매몰되지 말 것.

네, 여러분 나름의 진리 탐구를 응원합니다.

혐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참이었던 것에 머물러도 좋아.

나는 불교를 모르지만 불교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다.

“60살까지 저는 정원을 즐기며 차차 정리하고 제가 정원을 만들었던 곳을 다시 골목의 작은 공터로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청지기.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보편적 처방 같은 건 꿈꾸지도 말아야.

“SOY PORQUE SOMOS”

각자 상대를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럼에도.

“현자는 살 수 있는 만큼 살지 않는다. 그는 살아야 할 만큼만 산다.”

쓰기조차 살기보다 아래에 있는데, 하물며 읽기란.

자기의 죄만 참회하기에도 삶은 모자라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 가엾게 여기라.

우월감 없이 가여워하기?

이야기를 만들려는 본능. 따를 것인가, 거스를 것인가.

지극히 높으신 존재를 향할 때 비로소 지극히 영광된 예술이.

산적한 과제를 질서 있게 해결하는 방법을 구하기 이전에, 참된 과제만이 주어지도록 삶을 정비한다면.

계급 투쟁과 원예?

흙이 주는 위안이 크구나.

세상은 2천 년 전에도 이러했나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사나운 주인에게서 도망치다.

이스라엘은 어린이 17,000명을 죽였다!

식단에 미리 변화를 주고 습관화할 시간이 필요하겠다.

이건 “세상”을 향한 굴종이 아니고 오히려 그에 맞서는 연대의 일부임을 납득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결벽적인 병폐를 벗어 버리기가 너무나 어렵다. 계급의 적들, 탐식가들, 여성혐오자들과도 한 식탁에 앉아야 한다고 나 자신을 일깨우기가 너무나 어렵다. 나 또한 누군가의 억압자이자 파괴자이며 착취자임을 잊지 않기가 너무나 어렵다.

원래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법이다.

기나긴 독서와 탐구의 끝에서도 우리는 빈손이겠지만, 그럼에도.

진리가 아니더라도 감히 원하겠다.

어떤 인간은 본성상 역경을 추구한다.

인간에 비하면 영생에 가까운 존재들을 향한 경외심, 그 때문인지도.

철학 연구자가 되기란 어렵고 철학자가 되기란 쉽다. 아니, 더 어렵나? 누군가에게는.

“작품은 자신이 완성되는 순간을 안다. 그 순간 작가는 필요 없게 된다.”

“음악이란 한 음과 다음 음의 이야기”

모든 부분이 모든 부분에 영향을 준다. 삶과 글과 음악의 공통점.

서른세 번째 해가 저물었다. 나는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