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 교리 신청했다.
성실하지만 아둔한 사람. 속물이 아닌 줄 아는 속물.
내가 발견하는 티는 대부분 내 들보의 축소판이다.
가짜 가부장제의 피해자들이 때로는 가짜 가부장제의 이익에 복무하면서 다른 피해자들을 멸시한다. 이들은 가정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를 책임지는 동시에 가사도 전적으로 부담하는데, 가사의 가치를 부인하고 전업 주부를 무위도식자로 여긴다.
‘좋아요’가 정치 활동의 전부인 사람들.
문장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정신.
누군가가 타인과 교류하는 족족 악을 행한다면 우리는 순전히 그를 위해서, 말하자면 그가 더욱 많은 악을 행함으로써 더욱 구제 불능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 그를 고립시킬 수 있다.
그럭저럭 닮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반향실. 그 바깥에서는 부적응자. 사실 그 안에서조차 부적응자.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경멸한다.
“물은 피보다 진하다.”
도시에서 산책한다는 것은 탁한 공기를 마시며 사람과 자동차에 계속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는 것.
성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는 존재했는가.
배타적 집단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학교 안에 있지만 이 식당과 저 식당으로 편을 가르고, 같은 식당 안에 있지만 이 층 조리원들과 저 층 조리원들로 편을 가르고, 같은 층에 있지만 세척하는 사람들과 세척하지 않는 사람들로 편을 가른다.
견진 교리 시작했다.
그는 이런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는 이런 그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남달리 우둔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갈망하면서도 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고 거드럭대는 사람들.
결국 나의 분노는, 악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로 나를 밀어 넣는 나의 무능을 향한다.
“소수의 한국인은 저속하고, 다수의 한국인은 못 견디게 저속하다.”
이해하지도 못한 말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
역겨운 3인칭 화법.
당신의 온 존재, 당신의 타자성 자체를 아끼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혹은 많은 사람이 관성으로 선택하는 길에 나아가도록 나 자신의 중심을 허무는 결단이 사랑이라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고된 이별이 다가오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대화도, 만남도, 선물도, 말하자면 관계 전체가 침범이다. 침범이 기껍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 관계가 끝난다.
누구나 쉼 없이 닥쳐오는 생에 맞서지만, 이 자리에서 부딪어 온 사람은 나뿐이다. 다른 자리의 생은 다른 사람이 가장 잘 알 것이고 이 자리의 생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프레카리아트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과연 진짜 자유인지.
보잘것없이 작아질 때의 기쁨.
위대함의 찰나, 위대함의 파편도 가치 있다. 천재는 부단하게 위대함을 창출하지만 범인도 잠시나마 미약한 빛을 발산할 수 있다.
제1원리와 같은 사람.
정녕 무의미는 답이 될 수 없는가.
어쩜 이리 지독하게 관심이 안 생기는지.
경험의 공간적 밀도.
일터에서 냉정하고 무심하게 지내는 것과 별개로, 일터 바깥에서 일터에 관해 일절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가능하지 않아 보일 뿐더러 건강하지도 않아 보인다.
산 사람을 위로하는 건 죽은 사람뿐.
용서받지 못해도 좋다는 마음과 기꺼이 용서한다는 마음은 한 사람 안에 병존할 수 있다.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과 남이 폐를 끼쳐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나를 쓰기. 이곳에만 허락되는 솔립시즘.
너무 자주 정념이 솟구쳐서 동요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시간을 강탈하려는 모든 외부의 시도에 맞서기.
주거지 가까운 곳에서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필요한 것만 먹고, 필요한 것만 보기.
완성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성숙하다고도 할 수 없는.
정직하게 일하자.
듣지 않는 사람이 뱉는 말, 읽지 않는 사람이 쓰는 글이 우습지 않을 리가.
저의 삶에 침입하고자 한다면 저의 침입도 견디십시오.
우파의 모순은 조롱거리가 되어야 마땅한데도.
형편없는 체제가 러시아 문학으로 귀결되기도 하고 한국 문학으로 귀결되기도 한다니.
꼴사나운 주의자로 보인들 어떠한가.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다.
대림 제1주일,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오늘, 견진. 남은 반생의 적절한 출발점이 되기를.
인간은 결단과 실천으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에기노 바이네르트.
술이 나를 죽일 거다. 음주를 적당히. 자신 없으면 끊든가. 술이든 생이든.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가능한 한 단순해지기.
새삼스럽게 공교롭네.
걸어서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으면 동네지.
사시사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낡은 집에 살다.
그러나, 부조리를 못 견디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란.
이런 것들이 정말 “최저” 대우를 받아 마땅한 노동인가? 어떤 노동이 ‘다른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가치’를 꾸준히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진실인가?
“꽃은 시나 그림과 같은 것”
자연물보다는 인공물이 좋다.
이 시대는 무엇을 남길까.
당신을 사랑함이 곧 당신을 닮고 싶음은 아니니까요.
이성을 잠재우고 감정에 귀기울인 결과.
혐오가 이긴다. 이쪽이 싫어서 저쪽을 지지하고, 이쪽도 저쪽도 싫어서 방구석에 처박힌다. 혐오는 쉽다. 일체를 거부한 채 주저앉아 버리면 되니까. 나 역시 손쉬운 혐오를 택하곤 한다.
시간을 들여 귀기울이고 이야기하기—이 또한 많은 경우 상대를 변화시키겠다는 욕망을 바탕으로 삼지 않나?—이것조차 속 편히 혐오하려고 어기대는 심보일까?
기꺼이 설득당하겠다는 자세로 경청하고 책을 읽는 것이 옳은가? 좀 더 방어적이어야 하나? 변화하지 않을 작정이라면 왜 듣고 읽는가?
확실해 보이는 앎에 의탁하고 싶지만 언젠가 그 앎이 거짓으로 밝혀질까 봐 주저하기. 그렇게 삶이 끝난다.
갈팡질팡하는 정신.
확실하지 않아도 감행하는 결단이 부럽다. 언제쯤 삶을 살아 볼까.
무의미 속에서 허덕이는, 허무를 헤쳐 나가는 운동.
쓸모는 없고 귀엽기만 한 존재.
그 자체로 질이 보장되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 ‘책’이라는 단어는 낡아 버렸다.
“화장실 가는 게 질릴 순 없잖아?”
영상은 접근성이 떨어진다. 텍스트의 위력이 아직 소진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
경멸하는 데 머무르면 무지한 대중과 무엇이 다른가?
어차피 무결한 공동체는 없는데도.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왜관으로 간다.
그 순간이 영과 무관하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누구에게도, 무엇도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저 천천히 음미하기.
정치적 실천, 종교적 실천.
부드럽고 담백한 것을 먹기.
타자성을 사랑하되 길들임을 경계할 것.
시간을 삶으로 일구어 그것의 주인이 되어라.
소비 습관을 전면 검토할 것.
주되 받지 말기.
“전 지구적 증언”
누구 못지않게 교회를 갈망하기 때문에 교회를 혐오하는지도 모른다.
다들 잠시 거쳐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노동 환경이 개선될 리가 없다. 군대와 같은 것. 하긴, 의식적으로는 ‘거쳐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 세계조차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 인간인데.
사회에 무임 승차할 생각들만 가득하다.
우선 순위를 생각한다.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
사기꾼이 차고 넘친다. 구역질 나는 장사치의 말투.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일제고사를 치르니 맹탕인 내용만 가르치게 되고.
심미주의라는 이단, 엘리트주의.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더라.”
낯선 감각 자극에 대한 개방성이 점점 떨어진다.
역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상황 이상으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상황이 괴롭지.
천박한 자들도 마땅히 받을 몫이 있다. 끔찍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상상력. 기정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재고하기. 선택지가 사전에 제한되지 않았는지 살펴보기.
최저 임금 상승을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 우리는 (1)실직할 위험, 혹은 (2)(이미 한계 수준으로 노동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강도가 임금 상승분으로 보상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위험을 안고 있다.
옛 글을 읽을 때는 뻔하지 않은/않았던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한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지속 가능성 자체가 허상일지도 모르지만.
익숙한 것만 찾게 된다. 정신적 노화의 증거?
‘경제 정의 관념이 희박한 사람’이 “경제 관념 있는 사람”으로 포장되는 일을 자주 본다.
도피성 수면?
칭찬은 정녕 필요악인가. 하찮은 상태에 안주하게끔 만들어 버린다.
무엇으로부터, 어디로 도피하려는 생각인지.
상대가 말하게 하기.
시, 수필, 단편을 읽는 60분 남짓한 시간이야말로 길티 플레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말 것. 방법을 숭배하지 말 것.
삶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무언가의 목적인 동시에 다른 무언가의 수단인가? 무언가의 목적도 수단도 아닌가?
소박한 삶이 대단한 금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하나하나 음미하면 되는데.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가도, 그걸 받는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별종이라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삶의 핵심 물음을 쉴 새 없이 떠올리고 되새기기.
내가 살면서 만난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SF를 읽더라. 나는 SF를 못 읽는다.
겁내지 말고 분투하기.
다들 “어엿한” 일을 하고 싶어 하니까. 그게 문제야.
걸신스럽게 먹어 대지 말고.
자각 없는 앨런 소칼들의 세상.
저 똑똑하다는 사람들, 다른 모든 탐구는 무용한 호사인 양 굴던 자들이 모여서 왜 너절한 글짓기 기계나 만들고 있나?
소비주의가 정치를 망친다. 정당들이 아젠다를 내놓으면 정치 소비자는 그제서야 표를 지불하고, 따라서 정치 참여는 투표에 국한된다.
극장, 영화관에서의 경험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이 시절에야 비로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건 실상 자녀의 자기 실현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다.
래디컬한 주장의 가장 크고 흔한 결점은 역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 이건 329를 향한 우리의 비판에도, 그 역에도 해당된다.
모든 일에 거리로 나서면 정치가 실종된다.
시간을 들이기, 지켜보기를 못하는 사람들. 대의제의 훼손.
여행은 전적으로 낯선 규칙을 따르는 시간이고, 이건 꽤나 큰 스트레스.
이유 없고 끝도 없는 울증. 이걸 굳이 병으로 규정할 필요까지야. 현대 의학과 자본은 인간 실존의 기본 조건까지 눈독들인다.
안 하기는 쉬워. 나대는 인간은 안 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무작정 지지해 줄 사람을 찾는다. 왜? 어린 시절에 부모가 예뻐해 주지 않아서? 자신은 스스로 보듬으면 될 텐데.
어머니, 카라바조, 스타바트 마테르.
나에게 참인 것.
본질적인 과업과 부차적인 과업.
자살은 식상하다. 악착같이 생존할 것.
운명에 순응하며 기쁘게 슬퍼하기.
“살기, 읽기, 생각하기”
자고 또 일어나 일하듯, 죽고 또 깨어나 살겠지.
어쩌면 우리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잠을 얻고, 열심히 산 급부로 죽음을 얻는다.
관성으로 산다.
만사가 하찮아진들 진리가 비진리보다 못한 것이 될까?
객체/대상이 아니라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를테면, 자연이 의지를 지닌 주체라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어차피 나는 닥쳐오는 일에 맞부딪힐 뿐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불멸을 추구하는 태도는 종교적이다. 아니,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그런가? 종교는 본질적인 인간성의 한 측면인가?
첫째, 알고자 하는 욕망. 둘째,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
맘몬. 우상숭배.
남의 잣대에 복종하는 ‘어엿함’. 어엿한 직업, 어엿한 집, 어엿한 연인, …. 차라리 나르시시스트가 낫다.
서울시당 권리당원 협의체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생생하지 않은 것, 생생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하는 간결한 도구.
의리로 읽는 책, 의리로 듣는 음악.
사회에 대해 부채감을 가질 줄 아는 것도 지능이다.
중국,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5-15-50-80
기분을 정당화해 줄 텍스트를 찾아 떠돈다.
스승 삼을 만한 이를 분간하는 기준 역시 자기 연민이다.
집중력은 한정된 자원이고, 쓰레기 같은 글을 읽다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
작품을 평가할 능력은 없어. 작품이 불러일으킨 내 감정만 메모할 뿐이지.
‘누군가에게 잘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포괄하는지.
제너럴리스트가 되라는 말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배우라는 뜻이다. 온갖 데 아는 체 하라는 게 아니라.
의무는 의무일 뿐. 사랑받고 싶으면 의무로는 부족하지.
의견들이 넘쳐난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극좌, 극우 덕분에 뜨뜻미지근한 당파가 건전해 보이지.
우리는, 타인이 자신을 이해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버렸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기만 해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심지어 자신을 이해하는 (듯한), 이해하기까지 하는 (듯한) 사람을 만나면.
적게 소비하고 깊이 향유하기.
떠오르는 말을 전부 내뱉지 않는 건 나의 존엄을 위해서다.
믿음 없는 저를, 눈먼 저를 도우소서.
생생하지만 왜곡된 상.
상비군이 못 미덥다고 민병대에 의존하자는 건 바보 같은 소리다.
그리스도교는 인권이라는 현대의 종교를 전도하기에 그 무엇보다 적절한 수단인데도.
읽는 순간의 쾌락을 위한 독서도 의미 있다. 길 위에서 우리에게 부딪혀 궤도를 수정하게 만드는 책은 잊히더라도 유산을 남긴다.
감히 중국, 일본을 비웃어? 한국인 주제에?
사람들은 시시한 사람을 만나 주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서글픈 사실.
육체에 남은 ‘증언하는 상처들’을 좋아한다.
혁명은 불가능하다. 한 국가를 보더라도, 전 세계를 보더라도. 힘은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계속 흐른다.
육체적 만족을 주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야.
관심 끄라는 요구야 기꺼이 수용하지만, 그것이 참되다고, 아름답다고 말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지. 그것이 아름답다는 건 당신들의 생각일 뿐이다.
한편 공부는 자기 방어이기도 하다. 무수한 독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소극적 공부.
삶의 단 한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의는 놀라우나 탐나지는 않네.
민주당원들조차 이렇게 등신 천지라니.
대도시에서 인간이 원자화된다고 하지만, 소수자는 오히려 비로소 (다른 소수자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원자화에서 벗어난다.
내 마음속의 바리사이.
대학원생이라뇨, 제가 놈팡이는 맞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판단 기준이라고는 시장 가격뿐인 자들.
발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은 일부러 그러는 거야?
저무는 시대의 찌꺼기 주제에?
말 다듬고 그러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하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언어로 말할 권리, 타인의 언어를 이해할 의무.
베스트셀러에는 우리가 다 아는 뻔한 얘기만 들어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져 있어야 그렇게 팔린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은 따라서 과거에 있거나 현재에 숨겨져 있다.
원리와 소산을 분별할 것.
머릿속에 온통 그대 생각뿐인 이 순간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가족이 되기란 참으로 어렵다.
가치 있는 것을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은, 고요하고도 공허한 인간.
예술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면서 사람을 홀린다.
무엇을 누리려고 삶을 이렇게 아등바등 붙들고 있나?
믿음에 확신이 있으면 굳이 가르치려 들지 않고, 무언가에 신성 모독 딱지를 붙이지도 않는다.
‘애매하다’와 ‘모호하다’, 밤과 사랑.
“미사여구로 트집 잡기! 나의 지적 생애 전체를 위한 제사다!”
다양한 색을 지닌 점들이 병렬한 모습을 멀리서 보았을 때 우중충하게 비치는 것과, 본래 우중충한 색의 점만 모여 있어 멀리서 보아도 우중충한 것은 같지 않다. 전자를 가운데 길이라 부르고 후자를 불신앙 혹은 정치 혐오라 부른다. 물론 점 하나하나도 확대해 보면 이와 같을지 모른다.
형편없는 것들에 관해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당신과는 그런 얘기도 하고 싶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그들은 무엇을 믿는가?
어떤 명령이 참된 것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명령을 이행하지는 않는다면, 그는 믿는 것인가?
평생 하나의 이야기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각자에게 숙명적인 하나의 물음, 그 대답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
나의 삶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자기 위로, 변론.
이름을 부르고, 돌을 던지고, 어깨를 흔들어 줄 사람.
되는 대로 지껄이는 비대면 모임과 조직에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못하겠다.
반정립과 종합은커녕 정립의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잠시의 무료함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새로운 것을 걸신들린 듯이 퍼먹는다. 생각하는 시간 따위는 원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살아야 할 이유, 죽지 말아야 할 이유 같은 걸 왜 찾아? 네 삶이 그렇게 중요한 무언가가 아님을 언제쯤 깨달을까?
맛없는 음식은 괜찮다. 본질에 충실하지 않은 음식이 끔찍할 뿐. 핵불닭볶음면 따위가 맛없는 데에 불평할 수는 없다, 그게 본질이니까. 아니 어쩌면, 맛없는 음식은 곧 본질에 충실하지 않은 음식이라고 재규정해야 할지도.
그저 건전한 쾌락주의자, 건전한 딜레탕트이고 싶다. 세상 무의미한 것들에 ‘진지 빨고’ 싶지 않은 한편, 세상 무의미한 것들에 정신을 잃고 싶지도 않다.
황금으로 만든 변기만큼, 딱 그 정도로 하찮은 것들.
가벼운 글은 무겁게, 무거운 글은 가볍게 읽는 우스운 인간들.
그들은 짐승이건만, 짐승을 돌보는 일 또한 의무다.
그렇다, 그들은 회중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회 안에 있지만 사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이미 좋은 말, 좋은 책이 거인처럼 쌓여 있다. 실천 없이 여기에 한두 줌을 보태기만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에 몰입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게 없어서.
한 인간이 감화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어떤 고귀하고 저명한 인간이 검약하고 채식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면, 대다수 인간은 그가 고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범인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면, 그가 유별날 뿐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이 감화되려면 도대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예배하는 습관을 연대하는 습관으로.
주관이 구성한 대상의 모습을 사랑하기.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남의 자유를 못 견디는 자칭 자유주의자들.
민중은 만나 봐야 무의미하고 지성은 멀리서도 만날 수 있지.
죄는 각자에게 특유한 것이다.
나는 권위에 순종한다. 몇 안 남은 충실한 대중.
고결함과 저속함에 관계된 근본 문제는 결국 머릿수다. 상지는 너무나 적고 하우는 엄청나게 많아서, 중간자들이 교화된대도 역부족이다. 고귀한 이의 고귀함 자체, 고귀한 이가 소수라는 사실 자체는 불변한다.
남을 교화하려 드는 것은 반복음적 지배욕이다.
계급이 모든 것을 이긴다.
더위·추위와 괴로움은 별개니까.
복음을 따르는 길은 언뜻 자기 파괴의 길처럼 보인다.
찌끄러기가 소수라면 그쪽을 거르는 편이 빠르겠지만, 실상은 알맹이가 소수라서.
기정사실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매한가지다.
노력 없이 할 수 있기까지의 노력.
코리안 드림이 없는 코리안.
코헬렛이 우리를 위하여 길을 닦았나니.
알아 주기를 바라지 말 것. 제발. 꼴불견이다.
우리는 아직 나눔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나눔으로 나아간 지 너무나 오래되어 모음이 필요한 때가 되었는지도.
나는 기껏해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간신히 사랑한다. 그럴 수밖에.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기.
군중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사방에 있다. 증명을 멈추는 순간 군중에로 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실로 많은 영역에서 군중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무결함은 가능한 것도 아니고 내가 바라는 것도 아니며, 복음 역시 무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죄악임을 뻔히 알고도 죄악으로 돌진하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정의 판단을 의회와 법원에 의탁하지 말 것.
영원한 안식, 영원한 빛을.
보답할 때가 오기도 전에 떠난다, 나의 영혼도, 그의 영혼도.
한마디로 축약되지 않는 이야기를 위하여.
궂은 날씨에도 만나야 하고 비통함 가운데에도 모여야 한다. 어떤 악조건에도 공동체를 생성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슬픔이 슬프다.
나무위키만 읽는 자칭 “역덕”, 중고등학교 교과서식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한 촌뜨기, 믿음 따위의 단어에만 집착하는 예수쟁이라니. 이 모임도 텄다.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허접한가는, 한두 걸음 물러서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뿌리박을 수 없다. 물 위에, 그것도 흐르는 물 위에 떠 있기 때문에.
장수는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선인가?
한 발짝만 더 가면 중산층의 이데올로기 놀음이 된다.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물러나자.
짐승으로 되돌아가려는가?
이것저것 다 하려는 마음도 사치다.
발견의 즐거움을 상쇄하는, 산만함의 폐해.
의식을 변혁하지 못한 채 법이 앞서가는 게 효과가 있을까?
사람은 실상 자신의 생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생 전체를 인식하지 않고 당면한 순간에 매몰된다.
세련, 우아, 기품, 그런 것들은 내게는 너무 먼 곳에 있다.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 될 기회를 주듯이, 늙은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 될 기회를 주는구나. 감사할 일이다.
과격은 정도, 급진은 속도. 우리는 과격한 목표를 추구하지만 급진적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세계관이 단번에 뿌리부터 바뀌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는 극단적 세계관에 적도를 되찾아 주려는 시도다.
노이즈가 너무 많이 끼어서, 안 듣느니만 못하네.
정신에서 반드시 향기가 나야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악취는 좀.
휘둘리고 조종당한다. 주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지만 그저 노예다.
닮은 것을 평가하는 버릇.
사랑하기로 했다면 입 다물고 사랑하기. 그럴 수 없다면 군소리 말고 단절하기.
다들 자기 얘기, 아니면 가십이라기에도 따분한 남의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한 발짝만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낯선 세계를 훔쳐보면서 새로운 언어를 접하는 일도 좋지만, 작은 방을 너무 오래 멀리하지는 않았는지.
책을 함께 읽을 수는 없고, 영화라도?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는, 쌓아 올렸다고 믿으면 어김없이 무너져 흩어지는, 언제나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지성.
제발 ‘배고픔이 가시도록 하기’에 만족들 하시라.
악을 도려내는 고통.
삶은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여정’이 아니라는 것.
명단 만들어 돌리던 데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군.
스토아식 사고의 연장선 상에 놓인 자기 계발서.
그를 “존중하고 그를 추종하며 그와 연대 책임을 지고 그의 깃발 아래 열정적으로 동참”하기.
짐승은 계도할 수 없다.
먹는 데 돈 안 쓰고, 옷에도 돈 안 쓰고, 여행도 안 다닌다. 그러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소비, 향유, 창조, 그 사이 어딘가.
이제 음주도 힘에 부치네.
연관을 포착하는 힘이 지혜라고? 과연 그럴까?
왜 그렇게들 남을 부리고 싶어 할까.
파국을 응시하면서 사랑하기.
친구이려면, 연인이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견뎌야 하나?
손 내밀지 않는 자들에게 손 내밀지 말라.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경계할 것.
미디어 기업들은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보상하면서 지옥도를 만든다.
“그러는 너는, 절제하고 있나?”
그러나, 그들은 선을 직면하는 것조차 꺼린다.
귀족이고 싶지만 의무는 방기하는.
감각의 존재로서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을 보내도 괜찮다.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바칩니다. 이번에도.
말 그대로든 계량된 형태로든, 시간과 노고를 먹는 데 쏟고 싶진 않습니다.
B단조 미사는 언제나 설레게 해.
채식하더라도 자원을 엄청나게 소모하고 탄소를 엄청나게 배출할 수 있죠. 적당히 합시다, 제발.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덕분에, 간신히 나는 산다.
쉬기와 놀기를 구별하자.
존재와 기억, 비존재와 망각. 우리는 얼마나 존재해 왔는지.
개인 활동을 일 주일에 한 번 이상 함께하는 사람, 이 주일에 한 번 이상 함께하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이상 함께하는 사람.
삶을 펼치기란 ‘풍요롭게 발전한 사회’에서만 가능할까? 이 사회가 발전하기는 했나?
의식 너머의 의식이 육체를 괴롭게 만든다.
근원을 파고드는, 신적인 그림.
어째서 고귀한 시인마저 때때로 육욕에 사로잡히는가?
돌아다니기가 힘들고, 사람에 치이기도 싫고, 그래서.
내가 정말로 뭘 원하는지는 끝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흘러 와서 이런저런 걸 원하도록 떠밀렸는지도 모른다. 다짐과 단언의 말들은 그저 자기 최면이다.
자신됨을 포기할 바에야 사회를 포기할 것.
누군가는 살아가고 누군가는 구경한다.
책은 고사하고 글도 읽지 않지.
내가 나와 함께하지 못할 때 나는 외롭다고 느낀다. 내가 나와 함께할 때 나는 외롭지 않다고 느낀다. 물론 어떻게 느끼든 홀로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열을 가리지 않는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
인격들을 지워 버릴 것. 영원에 묻은 얼룩들.
화가 난다! 어떻게 삶은 이다지도 터무니없는지!
과연 기도가 모자랐을까? 간절함이 부족했을 리가 있나? 도대체 그 바람이 악한 것이었을 수가 있나? 그런데 어째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그는 정말 천재였던가?
당연한 것, 변하지 않는 것,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애초에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돈에 관해서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어떤 방향으로든 착각인데.
편협한 삶이 우리를 구원하리니.
그들은 치열한 분투 끝에 얻은 것들에 무관심하다. 예컨대 민주정, 지성과 같은 것에.
타인의 노동을 구매하지 않고 여가를 보내기.
모르는 사람들은 안다고 믿고, 아는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한다.
자랑거리가 얼마나 없으면 아픈 걸 자랑해?
숭배하지 않아야 따를 수 있다.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야.
유아론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자신이 얼마나 의존적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짐승들은 짐승답게 대우받기를 원한다. 지성을 강탈당하고 싶어 안달이라는 말이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인정에 목마른 패배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working class? false consciousness.
무용한 것들에 목매지 마세요.
짐승들이 만들어 낸 국가·정체는 자연 재해와 같은 것이다. 왜 그런 것이 자신을 덮치는지 불평해 봐야 의미가 없고 예방할 수도 없다.
사랑이니 결혼이니 지긋지긋.
전해질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자기만의 진리를.
“이 모든 비평의 소음”
나도 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자신이 없어서 절대자를 찾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어서 싸구려 마약 같은 물건들로 벽을 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들로 울타리를 두르는 것이다.
당신들이 옳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계몽하지 마소서!
서른두 번째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여전히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