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다: 21.10.03.~22.10.01.

삶에 질서를 부여할 때가 되었다.

배금주의자들의 나라. 아시아의 이웃들에게 이처럼 모멸감을 안겨 준 대가를 반드시 치를 것이다.

자신이 노동자임을 매일 같이 한탄하면서도 이를 까맣게 잊을 수 있다니.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신이 없다면, 선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죄를 짓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과 죄를 짓지 않고 싶은 마음은 서로 다른 것이다. 후자는 오만하다.

무대에 오른 모든 배우가 여러 가면을 쓴다. 두세 개, 열댓 개, 혹은 수십 개를, 기꺼이, 무심히, 혹은 부득이하게.

자기 연민과 자기 과시는 기이한 방식으로 한몸을 이룬다. 자기 연민과 자기 과시로 점철된 언어는 정신의 질병의 징후다.

혐오보다는 무관심이 나를 위해서도 이롭다.

선역과 악역이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는 사태들이 왕왕 있다. 이 또한 마땅한 일이다.

“하인에게는 영웅이 없다.”

어떤 것이 무한하다고 믿고, 무한에 동참하기를 갈망하는 일.

열여덟의 하잘것없는 결실을 서른 살 되도록 자랑거리 삼는다면 어찌 소인이라 불리지 않겠는가.

소비의 대상과 방법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차라리 소비하지 않음은 어떤가?

예행 연습도 없이 매 순간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새롭지조차 않으면 도대체 바흐보다 나을 게 무엇인가 말이다.

‘훌륭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지녀야지, 훌륭함의 기준을 낮추면 안 된다.

복음은 지배욕을 버리라고 거듭 이야기한다.

진리가 있고, 진리의 사도들이 있고, 진리의 사도들을 대접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판은 사도들을 대접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세속의 예언자들.

부끄럽고 죄스러워야 겨우 사람 노릇 한다.

무절제한 탐식가들의 죄를 대속할 것.

사회적 판단력 결여의 자각 여부와 도야 여부를 기준으로 네 부류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자각하고 도야하는 부류, (나) 자각하고 도야하지 않는/못하는 부류, (다) 자각하지 않고/못하고 도야하는 부류, (라) 자각하지 않고/못하고 도야하지 않는/못하는 부류. (가)는 학인이다. (나)는 어수룩하거나 파렴치하거나 가엾은 사람이다. (다)는 있을 성싶지 않은데, 자각은 도야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라)의 한 부류는 짐승이다. 이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라)의 다른 한 부류도 짐승이다. 이들은 가장 악질인데, 자신이 판단력을 완비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밥 굶을 걱정만 사라져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일을 해낼 텐데.

그리거나 만들거나 필사하는 취미는 재료를 소모하고 쓰레기를 남긴다. 악기를 연주해도 쓰레기는 나오지만 이 쓰레기는 시간 속으로 흩어진다.

등급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등급 얘기조차 안 한다. 계급 문제에서든, 학식 문제에서든.

세계의 갱신이 유예된 것과 별개로, 우리는 당장이라도 이 세계를 떠날 준비가 된 거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까? 내일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연은 없다. 아니 어쩌면, 자연은 모든 것이다.

그만한 자원을 소모하고 그만한 탄소를 배출할 만큼 나의 경험이 귀중하지는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음식이든, 여행이든.

뻗어 보지 않아도, 닿지 않을 걸 안다.

종이로 출판할 가치가 있는 책은 정말 드문데.

조사 하나까지 적확하게, 불필요한 꾸밈 없이, 진실하게 쓴 것 같은 글은 드문 만큼 더욱 귀중하다.

그깟 구더기 몇 마리 두려워서, 고매하신 나으리들이 떠먹여 주길 기다릴 생각은 없다.

기본적으로는 무관심하고, 그렇지 않으면 귀찮아한다. 학생이 다 그렇지.

최대 연합을 구축하는 최소 강령.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공통의 토대가 이렇게 작아진 시대에.

보시급물하지 못하면 글을 쓰고, 그조차도 하지 못하면 글을 옮긴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로 후세가 없음을 염려해야 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류의 황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야말로 21세기의 복음이며, 여전히 대다수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여전히 주어진 시간은 짧고, 사도들은 먼지를 발에서 털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삶을 준비하는 동안 삶은 우리를 떠난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란 ‘은 세공된 바구니 안의 진리를 엿보기’이고, 이를 위해서는 매일 한 시간 읽고 한 시간 숙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매일 규칙적이고도 충분한 수면과 규칙적이고도 소박한 식사를 확보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라면 하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삶이고 나머지는 장식이다.

비장하지 않게, 가볍지도 않게.

남들은 단순한 존재, 자신은 복잡한 존재?

건강한 신체를 향한 ‘나치적 찬미’와 ‘건전한 찬미’가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탈정치라는 미신. 전근대적인.

사람들의 욕망과 정념을 어디로 향하게 만들어야 할까? 명예가 무가치한 시대의 동기 부여 방법.

죽지 않고 살아갈 구실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우리는 각자 박물관을 세운다. 북적이는 박물관도 혹 있지만, 대다수는 관람객이 거의 없다.

때 빼고 광내는 건 관심 없고, 냄새 안 나고 먼지 안 나면 족하지.

나의 얕음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본성상 얕은 이가 얕은 데에 불평할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그친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분주하다.

무색 무취의 인간임이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그게 편할 때도 많다.

욕망이 작고 수수하다는 것은, 이런 시대에, 굉장한 미덕이다.

이 재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도 지금 고통받는 사람의 비참함이 줄어들지는 않는데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다른 누구보다 그들에게 재앙의 책임이 있고, 그들은 그 책임을 벗어던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재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말자. 노력으로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인간은 결국 혼자다. 고통스럽지는 않은 외로움. 오히려 황홀하다고 할까.

내가 아는 것도 세상이고 그들이 아는 것도 세상이다. 누가 진짜 세상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으름도 이기심에서 나온다. 과연 이기심은 원죄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30년을 살아 보니 비로소 스승 삼을 만한 이를 분간하겠다. 다만 그들은 대부분 죽어 있다.

인생에서 성취며 보람을 찾는 것도 결국은 오만이다.

마땅히 가질 수 있는 건 한 아름. 장악되지 않는 것은 전부 사치.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 말고,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주목하는 감정 교육이 훨씬 중요하다.

어찌 보면 딱한 것이다, 그만한 시간과 자원을 들여야 비로소 그런 걸 깨닫게 된다면.

단정하게 죽어야 할 텐데.

한 줌의 책으로 벽을 치고 쳇바퀴 돌기.

체면 따지고 돈 좋아하는 한국 문화의 결정체라서, 총체적으로 웃긴 것이다, 결혼이란.

타오르는 불꽃 속에 있는 사람은 그 불길이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없다고 했던가.

오직 외향하는 것만큼이나 오직 내성하는 것도 문제다. 텅 빈 공간을 하염없이 응시하면 미쳐 버린다.

성직자가 되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자들이 로만 칼라를 두르고 있다.

이 인간들은 뭘 얼마나 쥐어야 만족할 셈인지 모르겠다.

과제에 압도당하지 말자. 순순히 한계를 인정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때로는 생각 없이, 습관으로 하루를 보낼 필요도 있다.

가짜 박탈감에 절어서, 가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찢어 버리는, 매스꺼운 생떼거리.

사람이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지듯, 국민도, 국가도.

짐승들, 짐승들, 그리고 짐승들.

많은 사람들이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절대 다수는 제 잇속만 챙기는 금수고, 이들을 구원할 가능성이라도 지닌 사람은 소수다.

전례 없는 규모로 벌어지는 인간 대 인간의 전쟁. 한쪽은 자신도 상대도 죽이려 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도 상대도 살리려 한다는 점이 기묘하기는 하다.

정신이 곪아 버린 서울 중산층. 공상적 교설에 매몰된 상위 중산층. 지긋지긋한 수컷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이 배웠다는 세대가 무슨 짓을 했나?

경건함을 잃어버린 세계. 개인주의, 계몽주의, 심미주의.

그는 그런 자신만이 너무도 가여운 것이다.

그 또한 죽을 것이다. 부지런하게 도를 구하라.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거인이다.

‘학술적 주석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상세한 주석을 포함한 번역은 세금으로 연구하는 연구자의 몫이지요.’

그분의 앞날에 축복을. 말로 다 못할 감사를.

“슬프다, 어디에서 나 찾을까, / 겨울이 오면, 꽃들과, 어디에서 / 햇빛과 / 대지의 그림자를? / 성벽은 / 말 없이 차갑게 서 있고, 바람에 / 풍향계 덜컥거리네.”

“눈이 오면, 달이 뜨면, 꽃이 피면 당신을 떠올립니다.”

글을 쓰거나 글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면서 글을 읽는 사람이란 얼마나 드문지요.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도 종교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저는 경박한 데다 재미도 없는 사람이어서, 어울리기가 미안하다고 할까요.

어떤 사람은 쉽게 길을 잃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개 돌리도록 도와주는 물건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안전한 공간, 안전한 사람을 찾아 헤맨다. 열린 공간, 불특정 다수란 두려운 것이니까.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교회, 도서관, 미술관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모임 동료, 형제자매, 무엇보다 연인일 수도 있다. 물론 때때로 그런 것들에게마저 배신당하지만.

공공 영역에서는 천 마디 듣고 한 마디 뱉는 게 마땅하다. 좋은 말은 이미 누군가가 내놓았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마저 새롭지 않으니까. 듣기보다 뱉기를 좋아하는 세태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져온다.

오늘까지 살 것처럼 살다가도, 예순까지 살 것처럼 산다.

무례함을 예민한 성정의 발현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추론 능력이 뒤떨어지는 것일 따름이다. 사회적 효과에 둔감한 지성을 두고 예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당하지 않다.

아주 드물지만 변화하고 발전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큰 빚이 있거나 건사할 식구가 있다면 몰라도, 건강한 홀몸 돌보면 그만인데 돈 앞에 아등바등, 추해.

소란한 세상이다, 저마다 자기를 봐 달라고 아우성이라. 밥벌이는 해야 할 테니 이해는 한다만.

준 건 잊어도 받은 건 잊지 말아야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일이니까 돈을 주고 시키지 않겠나.

현재 시제도 미래 시제도 색이 바래고 박제된 과거만 나를 증언한다.

픽션 아닌 것이 얼마나 되는가? 신도 사랑도 픽션인데.

거룩함, 경건함,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한국인 가운데 그런 식으로 여가를 보내는 사람의 비율은 아주 작다. 덕분에 서울 경기 2천 만이 산다 해도 수도권 예술가 모두가 형편이 좋지는 않다.

말은 말일 뿐이다. 인간의 말은 허깨비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학식보다는 분별력, 지식보다는 판단력.

변명거리 먼저 찾는 버릇.

세상은 온통 소음.

평범하고 시시하게 살기.

누군가가 자신의 세계를 살짝 열어서 보여 준다면, 감히 그것에 대한 평가를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사하기 혹은 물러서기, 그뿐이다.

자신은 내향적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여가를 보내곤 한다고 말하는 사람 중 일부는, 사실 기력이 부족해 집안에 머무를 뿐, 작은 화면을 통해 쉼 없이, 게걸스럽게 집밖을 내다본다.

자기 자신 외에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관심과 무의미의 향연.

먼지, 티끌, 흙더미에 불과한 존재들.

사회가 어떤 가치를 배반한다면 이 가치에 대한 교육은 무의미하다. 어린이조차도 사회의 위선을 알아본다.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 자기 기만.

확실히, 고장나지 않으면 신체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좀처럼 드물다.

생각의 재료조차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머리.

어째서 나는 아직도 기지 넘치는 이들을 동경하는가? 그들 또한 먼지가 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삶을 한탄하기보다는 웃어넘기는 것이 인간적입니다.”

미루지 말고, 아끼지 말고,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자. 영혼이 떠나는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목숨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 목숨 걸고 하는 무언가는 따라서 하찮은 법이다.

많은 문제가 황금률을 어기는 데서 출발한다.

노출증이 있는 사람들은 실상 들여다볼 내용조차 없다. 정말로 흥미로운 사람들은 숨어 있다.

“그가 그였기 때문에, 내가 나였기 때문에.”

생명의 무게는 같지만 죽음의 무게는 같지 않다. 죽음은 많은 경우 선택에 뒤따르고, 세상에는 바보 같은 죽음이 넘친다.

의견을 가져야 할 것에 의견을 가지고, 의견을 가지지 않아야 할 것에 의견을 가지지 않기.

널리 판촉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구 사항이 적고 가벼운, 편안한 종교.

중세인들이 이보다는 훨씬 신실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정도 성취도 못하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나뿐이고 내게 관심 있는 것도 나뿐이다. 세계는 정신 속에만 있다.

특색 없는 어느 날의 아침으로 뭘 먹을지 사흘 밤낮 고민하기. 수많은 문제의 실상이 이렇다.

그만 먹고 소화해라. 생각을 하라는 말이다.

행동만 진짜다. 할 것 말고 한 것.

‘기대하지 않겠다’, ‘요구하지 않겠다’, ‘침범하지 않겠다’, …. 이 모든 ‘하지 않겠다’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이것을 극복하면 세계와 합일할 수 있는가?

앞서 나아가시는 분들의 빛에 의지하면서.

이만하면 충분히 살아 본 것 같은데, 무엇이 부족하다고 여기시기에 아직도 데려가지 않으시는지?

열렬한 사랑을 쏟을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기대와 통제를 벗어나는 것에는 애정이 식어 버린다면, 도대체 뭘 사랑할 수 있을까.

외양에 고착하고 실질에 무심하니 천생연분인지도.

영화도 좋은 것은 아니니 상급이랄 수 없고, 곤궁도 나쁜 것은 아니니 형벌이랄 수 없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저자가 서술 시점까지 무엇을 읽고 무엇을 써 왔는가. 당대인들도 오독하곤 한다.

이런 점은 변화하고 저런 점은 불변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이런 점은 불변하고 저런 점은 변화하면 그저 그런 대상이 될 뿐.

낡을 각오가 없다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기꺼이 틀리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영혼.

오해하게 두자. 모두에게 해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저자는 독자를 이해시킬 생각이 진실로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 쓰는가?

배고픔은 실상 분별없는 것인데도 분별없는 사람들은 속아 넘어간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나는 꿈을 꾸고 있다. 깨어나기 위해, 무엇에도 몰입하지 않고 있다.

같잖은 인간들이 싫다. 동족 혐오란 정말 매섭거든.

그들도 자신의 진짜 갈망이 얼마나 천박한지 알기 때문에, 차마 거기까지는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의미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자극을 징그럽게도 좇는 인간들.

탁월한 것은 많은 경우에 시대착오적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문장을 지어내는 데 염증이 난다.

유의미한 노동을 하되 과시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사회를 떠받친다.

저는 자족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요. 무기력한 사람일 뿐이죠.

호기심이란 크기만 있고 방향은 없는, 누구나 타고나는 힘이다. 방향은 선택하기 나름.

‘알기를 원하다’. 이성과 정념의 결합. 이론과 실존의 결합.

음미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 걸 주고 싶진 않지.

그는 내 삶에 침투한 악마적인 힘이다. 자아만을 돌보라고 유혹하는, 타자를 증오하도록 초대하는, 궁극에 대한 오만을 부추기는 힘이다. 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악마도 증오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기를 기도하며 살 것이다.

서른한 번째 해가 저물었다. 주제를 조금 깨달았고 어떤 욕망을 여의었다.